한국에 사는 게 이미 SF급...기생 생물·인공배양육 나오는 드라마에 '자본' 몰린다

입력
2024.04.16 04:30
수정
2024.04.16 08:15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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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형 SF 드라마' 제작 이례적 바람
'기생수: 더 그레이' '지배종' '종말의 바보' 등
상반기 4편 이상 공개...지난해 대비 2배 증가

①SF 친화적 1030세대 등장
②K콘텐츠의 글로벌화
③저출생 위기 등 공존 위기 반작용

배우는 연기에 진땀, 일본 원작 치중 한계도

'기생수: 더 그레이'(왼쪽)는 환경 위기를, '종말의 바보'는 지구와 소행성 충돌을 소재로 한 공상과학(SF) 드라마다. 넷플릭스 제공

'기생수: 더 그레이'(왼쪽)는 환경 위기를, '종말의 바보'는 지구와 소행성 충돌을 소재로 한 공상과학(SF) 드라마다. 넷플릭스 제공

#1. "멋진 공상과학(SF) 쇼다. 인간이 괴물로 변했다가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게 공포스럽다." 넷플릭스 드라마 '기생수: 더 그레이'(이하 '더 그레이')를 본 해외 시청자의 평이다. 영화·드라마 평점 사이트 IMDB에서 '더 그레이' 평점은 15일 기준 10점 만점에 평균 7.3점(5,900명 참여). 지난 5일 공개된 뒤 14일까지 10일 연속 넷플릭스 시리즈 부문 세계 1위(플릭스패트롤 집계)를 달리고 있다. 이 드라마는 인간을 숙주로 삼는, 외계에서 온 기생 생물들과 이를 막아내려는 인간들의 대립을 보여준다.

드라마 '지배종'은 줄기세포로 배양된 인공 고기가 먹거리를 대체한 가상의 미래를 배경으로 한다. 디즈니플러스 영상 캡처

드라마 '지배종'은 줄기세포로 배양된 인공 고기가 먹거리를 대체한 가상의 미래를 배경으로 한다. 디즈니플러스 영상 캡처


드라마 '지배종'에서 줄기세포로 배양된 인공 고기에 지방을 넣고 있는 장면. 디즈니플러스 영상 캡처

드라마 '지배종'에서 줄기세포로 배양된 인공 고기에 지방을 넣고 있는 장면. 디즈니플러스 영상 캡처

#2. 디즈니플러스 드라마 '지배종'엔 호텔 천장에 도축된 소가 줄줄이 매달려 있는 홀로그램 이미지가 나온다. 생명공학기업 대표 윤자유(한효주)가 내빈들 앞에서 배양육 프로젝트를 발표하는 장면에서다. 줄기세포로 배양된 새빨간 고기에 초정밀 기계로 하얀 지방을 손금처럼 입히는 생산 과정이 영상으로 깔린다. '지배종'은 여물을 먹고 자란 소·돼지 대신 인공 배양육이 먹거리를 대체하는 가상의 미래를 배경으로 의문의 죽음과 사건의 실체를 쫓아가는 SF 드라마다.

'기생수: 더 그레이' 한 장면. 넷플릭스 제공

'기생수: 더 그레이' 한 장면. 넷플릭스 제공


김은숙도 실패한 '흥행 불모지'였는데

K콘텐츠 시장에서 'SF 드라마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다. 이달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에 공개됐거나 공개를 앞둔 SF 드라마는 '더 그레이'와 '지배종'을 비롯해 지구와 소행성의 충돌이 예고된 200일간 혼란에 빠진 사회를 그린 '종말의 바보'(넷플릭스·26일) 등 3편이다. 지난 3월 선보인 '닭강정' 등을 포함하면 올 상반기에 편성된 SF 드라마는 네 편 이상이다. 2022년 상반기에 공개된 SF 드라마가 '지금 우리 학교는'과 '그리드'까지 2편이었고, 지난해 같은 기간에도 '방과 후 전쟁 활동'과 '택배기사' 등 2편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2배 커진 규모다.

김은숙 작가가 SF 장르에 도전한 드라마 '더 킹: 영원의 군주'. SBS 제공

김은숙 작가가 SF 장르에 도전한 드라마 '더 킹: 영원의 군주'. SBS 제공

한국은 오랫동안 SF 드라마 흥행 불모지였다. JTBC가 개국 10년을 기념해 200억 원대의 제작비를 투입해 야심 차게 준비한 '시지프스:더 미스'(2021)는 시청자의 외면을 받았고, '흥행 보증 수표'로 통하는 김은숙 작가도 '더 킹: 영원의 군주'(2020)로 고사 위기에 빠진 SF 장르 심폐 소생에 나섰으나 실패했다. 꽁꽁 얼어붙었던 시장 분위기를 고려하면 요즘 SF 드라마 제작 열기는 이례적이다.

드라마 '종말의 바보' 한 장면. 넷플릭스 제공

드라마 '종말의 바보' 한 장면. 넷플릭스 제공


한국적 위기, SF에 리얼리티

달라진 양상은 소비자 변화와 맞물려 있다. 10~30대는 이미 SF와 닮은 삶을 살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학교와 회사에서 관계 단절을 경험한 이들은 인공지능(AI) 챗봇과 친구처럼 대화한다. 북극곰에게나 영향을 끼칠 줄 알았던 기후변화 위기를 직면한 10대는 환경 운동에 관심이 많다. SF적 사고와 생활에 친숙한 세대가 등장해 SF 드라마를 적극 소비하는 배경이다. 소설가이자 드라마평론가인 박생강은 "김초엽, 정보라 등 스타 작가들이 나오며 답답한 한국적 현실을 거리를 두고 보는 방식의 SF 소설이 출판 시장에서 일찌감치 주목받았다"며 "그 흐름과 맞물려 드라마 시장에서도 SF 제작 움직임이 활발한 것"이라고 진단했다.

미국 드라마 '디 애콜라이트' 속 이정재의 모습. '스타워즈' 시리즈 속 마스터 제다이 캐릭터로 등장한다. 디즈니플러스 영상 캡처

미국 드라마 '디 애콜라이트' 속 이정재의 모습. '스타워즈' 시리즈 속 마스터 제다이 캐릭터로 등장한다. 디즈니플러스 영상 캡처

K콘텐츠의 글로벌화는 SF 드라마 제작 열풍에 불쏘시개 역할을 했다. 1~4월 공개된 4편의 SF 드라마는 모두 글로벌 OTT 자본으로 제작됐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SF는 지구적 서사가 특징"이라며 "글로벌 OTT들이 지구적 서사를 한국 드라마를 통해 펼쳐 보이는 건 그만큼 K콘텐츠의 세계적 파급력이 높아졌다는 뜻이면서 한국적 SF로 세계 구독자를 끌어모으려는 전략이기도 하다"라고 봤다. 그간 미국과 영국 콘텐츠 시장에 집중됐던 해외 SF 드라마 제작 자본이 한국으로 넘어오게 된 이유다. 한국 배우 이정재가 미국의 건국 신화에 비유되는 '스타워즈' 시리즈('디 애콜라이트'·6월 공개)에 광선검을 휘두르며 등장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SF 드라마를 만든 한 제작사 관계자는 "10년 전만 해도 한국 시장에서 SF 소재는 기피 대상이었다"며 "이제는 내수뿐 아니라 해외 시장도 중요해진 만큼 업계도 SF 스토리를 적극 들여다보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드라마 '지배종'에서 생명과학기술 회사 대표를 연기하는 한효주. 디즈니플러스 영상 캡처

드라마 '지배종'에서 생명과학기술 회사 대표를 연기하는 한효주. 디즈니플러스 영상 캡처

SF 드라마 제작이 잇따르는 것은 저출생과 세대 갈등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오르며 공존에 대한 위기감이 커진 데 따른 반작용이란 해석도 있다. 윤석진 충남대 국문과 교수는 "지구 밖 위협적 존재를 상정해 내부 결속을 다지는 게 SF의 고전 문법이자 사회적 기능"이라며 "저출생 등 한국적 사회 위기가 SF의 장르적 상상력에 리얼리티를 부여하는 양상"이라고 분석했다. 평범한 고등학생이 주인공인 일본 원작과 달리 '더 그레이'에선 여성 범죄 피해자로 마트에서 일하는 정수인(전소니)이 주인공으로 나와 죽어가다 살아난다. 머리카락이 짧다는 이유로 여성인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이 모르는 남성으로부터 폭행당한 사건을 비롯해 요즘 한국 사회에서 빈번히 일어나는 혐오 범죄 문제와 묘하게 겹친다. 연상호 '더 그레이' 감독은 "(일본) 원작에서 다뤄지는 사건이 한국에서 동시에 벌어졌다고 가정하고 '인간의 공존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볼 수 있는 장치들을 넣었다"고 제작 의도를 밝혔다.

드라마 '기생수: 더 그레이'에서 정수인(전소니)은 마트에서 일한 뒤 퇴근길에 범죄를 당한다. 넷플릭스 제공

드라마 '기생수: 더 그레이'에서 정수인(전소니)은 마트에서 일한 뒤 퇴근길에 범죄를 당한다. 넷플릭스 제공


일본 원작에 기댄 '반쪽 성장'

SF 드라마 제작이 늘면서 배우들과 스태프들은 진땀을 흘리고 있다. '더 그레이'에서 절반은 기생 생물, 절반은 인간으로 살아가는 수인을 연기한 전소니는 "촬영 전 액션 스쿨에 갔더니 선생님도 뭘 가르쳐야 하는지 모르더라"라며 "(체력을 다지는) 기초 훈련만 하다 집에 왔다"고 SF 캐릭터 연기의 고충을 들려줬다. 사람 얼굴 등에서 나온 긴 촉수로 상대를 위협하는 기생 생물 연기를 어떻게 해야 할지 가늠하기조차 어려웠던 탓이다. 고민 끝에 연 감독은 민속놀이인 상모돌리기에서 영감을 얻어 목과 얼굴을 좌우로 자유롭게 돌리는 춤사위로 기생 생물 액션을 짰다. 그 후 촬영장은 '풍물놀이 공연장'으로 변했다. 연 감독이 상모돌리기 액션을 시연하면 그걸 보고 배우들이 줄줄이 머리를 뱅글뱅글 돌리며 연기했다.

제작은 부쩍 늘고 있지만 SF 소재가 빈곤한 건 K콘텐츠 시장의 한계다. 올 상반기 공개될 4개 SF 드라마 중 '더 그레이'와 '종말의 바보' 등 2편은 모두 일본 원작이다.

양승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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